┗(* ̄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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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 me baladais sur l'avenue, le coeur ouvert a l'inconnu
즘 발라데 술 래브뉴 , 르 꽤 후베 아 랑꼬뉴

J'avais envie de dire bonjour à n'importe qui
자 베 졍비 드 디흐 봉쥬 아 넴 뽀뜨 끼

N'importe qui et ce fut toi, je t'ai dit n'importe quoi,
넹 뽀뜨끼 스 퓌 뜨와, 쥬 떼 띠 넴 뽀뜨 꽈

Il Suffisait de te parler, pour t'apprivoiser.
일 스퓌제뜨 드 빠흘레 뿌 따 쁘리봐제

Aux Champs Elysees, aux Champs Elysees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Au soleil, sous la pluie, a midi ou Ã? minuit
오 솔레, 수 라 쁘뤼, 아 미디 우 아 미뉘

Il why a tout ce que ous voulez aux Champs Elysees
일 리 아 뚜 스 끄 부 불레 오 샹젤리제

Tu m'as dit "J'ai rendez-vous dans un sous-sol avec des fous,
뛰 마디 져헝데 부 덩 정 수솔 아벡 데 푸

Qui vivent la guitare à la main, du soir au matin".
끼 비브라 키 타 라멩 뒤 솨오 마땅

Alors je t'ai accompangee, on a chante, on a danse
알로쥬떼 아꽁빠녜 오 나 샹떼, 오 나 덩세

Et l'on n'a mÃ?me pas pense Ã? s'embrasser.
에 롱 나 메메 빠 뻥세 아썽하세

Aux Champs Elysees, aux Champs Elysees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Au soleil, sous la pluie, Ã midi ou a minuit
오 솔레, 수 라 쁘뤼, 아 미디 우 아 미뉘

Il why a tout ce que ous voulez aux Champs Elysees
일 리 아 뚜 스 끄 부 불레 오 샹젤리제

Hier soir deux inconnus et ce matin sur l'avenue,
이에흐 스와 드 장꼬뉴 에 스 마뗑 술 래브뉴

Deux amoureux tout etourdis par la longue nuit,
두 자무흐 뚜 떼뚜디 빠 라 롱그 뉘

Et de l'Etoile Ã? la Concorde, Un orchestre Ã? mille cordes,
에 들리뜨왈 아 라 꽁꼬드, 아노케 스트라 미흐 꼬드

Tous les oiseaux de point du jour, chantent l'amour
뚜 레 좌조지 퐝 데 쥬, 셩뜨 라무

Aux Champs Elysees, aux Champs Elysees
오 샹젤리제, 오 샹젤리제

Au soleil, sous la pluie, Ã midi ou a minuit
오 솔레, 수 라 쁘뤼, 아 미디 우 아 미뉘

Il why a tout ce que ous voulez aux Champs Elysees
일 리 아 뚜 스 끄 부 불레 오 샹젤리제


 

레 샹제리제로 큰 인기를 얻은 조 다신 -출처 위키백과

프랑스하면 떠 오르는 음악중 하나인 "레 샹젤리제(Les Champs-Élysées)"는 파리의 아름다운 샹젤리제 거리를 노래한 로맨틱하고 낭만적인 가사의 노래인데요.

샹젤리제 거리

미국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하여 가수가 된 "조 다신(Joe Dassin)"이 영국 록 밴드 "제이슨 크레스트(Jason Crest)"의 "워털루 로드(Waterloo Road)" 곡을 프랑스 가사로 각색해 1969년 발표하게 되는데요. 이 노래는 프랑스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게 되었고 현재는 프랑스하면 떠오르는 대표 노래중 하나가 됩니다.

 

프랑스는 유럽 연합 소속 국가 중 영토가 가장 넓은 나라로 서유럽의 본토 프랑스와, 과거 식민지 영토 확장 시대때 확보한 해외 영토를 소유 하고 있는데요. 이는 프랑스 지방 행정 구역 단위(한국의 도(道)와 비슷)를 '레지옹(région)'이라 말하는데 현재는 총 5곳의 해외 레지옹(과들루프, 마르티니크, 프랑스령 기아나, 레위니옹, 마요트)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과거 16세기 프랑스 식민제국 시대 북아메리카 대륙을 시작으로 알제리, 바누아투, 베트남도 프랑스의 식민지였으니 얼마나 왕성하게 식민제국 건설에 앞장 섯는지 알수 있습니다. 프랑스는 또한 영국을 도와 중국에 대한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켜 전쟁에 승리하게 되는데요. 이로인해 1858년 6월 베이징에서 승전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그리고 패배국 청나라는 현재 중국의 지우고 싶은 굴욕적 역사 중 하나인 "톈진조약"을 맺게 됩니다.

"갈리아인 프랑스"


고대 갈리아인 들이 살았던 프랑스 지역은 로마 공화정 초기 로마를 침공하고 약탈하던 세력이였는데요. 이후 로마의 세력이 강해져 기원전 51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프스 산맥 지역에 살던 갈리아인들을 복속시킨 후 갈리아인들과 로마와의 교류가 늘어나며 갈리아인들은 로마 문화에 동화되 독자적인 문화를 잃고 라틴화 되게 됩니다. 로마 제국에 충성하던 갈리아인들은 서로마 제국이 475년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자 이 시기를 계기로 프랑크 왕국을 수립하게 됩니다. 훗날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칼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이후 내전이 일어나, 베르됭 조약으로 제국이 나뉘게 되는데요. 그중 서프랑크 왕국은 987년 프랑스 왕국으로 성립되게 됩니다. 프랑스 왕국은 필리프 2세의 강력한 왕권을 기반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했는데 약해졌던 국력이 단번에 신장되었으며 이로인해 유럽의 주요 강대국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특히 14세기부터 16세기 말까지 일어난 르네상스 시기에는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여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나라가 됩니다.

"스페인과 프랑스는 한 나라가 될뻔 했다"


72년 3개월 18일, 유럽 군주 중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1638년 9월5일~1715년 9월1일)'의 왕비 '마리 테레즈(1638년 9월10일~1683년 7월30일)'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1661년 11월 6일~1700년 11월 1일)의 배다른 누나로 '루이 드 프랑스'(1661년 11월1일~1711년 4월14일) 왕세자를 낳게 되는데요. 태양왕 루이 14세의 어머니 '안 토트리슈'(1601년 9월22일~1666년 1월20일) 또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왕 펠리페 3세가 아버지였기에 프랑스 왕가의 피에는 스페인 왕가와 많은 연관이 있게 됩니다.

병약한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 -출처 위키백과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는 당시 흔했던 친족간 근친상간으로 많은 장애를 갖고 태어나 후손에 대한 기대를 할수가 없었는데요. 이는 스페인 왕족과 혈연으로 이어진, 프랑스 태양왕 루이 14세의 아들 '루이 드 프랑스'를 스페인의 왕위로 계승하기 위한 계획이 이뤄지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비운의 왕세자 루이 드 프랑스 -출처 위키백과

하지만 더 큰 왕국이 탄생하게 되면 유럽내 힘의 균형이 깨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럽 곳곳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1년~1714년)이 유럽과 식민지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발생해 결국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이 유럽 연합군(영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독일, 포루투갈, 이탈리아, 신성로마제국)에게 최종 패전 하게 되며, 두번의 조약(위트레흐트 조약 1713년, 라슈타트 조약 1714년)으로 인해 기존 스페인과 프랑스 령의 영토가 일부 사라지고 스페인의 왕을 '펠리페 5세(1683년 12월19일~1746년 7월9일)'만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데요. 그후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국이 합쳐지는 일은 없어지게 됩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시작된 민주주의 증폭"


1789년 5월 5일~1799년 11월 9일은 프랑스 대혁명(serment du jeu de paume 시민혁명)이 일어난 때인데요. 이때는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 레짐 하에서 18세기 모든 선진국에서 일어난 특징중 하나인 자본가 계급이 급부상하고 미국 독립혁명(1775년~1783년)의 영향으로 인해 프랑스 내에서 자유의식이 고취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미국의 독립전쟁 -출처 위키백과

※ 군주가 막강한 권력을 가질수 있는 절대 군주의 체제를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이라 부르는데, 이는 낡은 기존의 제도나 무능력했던 이전의 정권을 일컫는 단어로 불리기도 합니다.

혁명시기 만들어져 지금까지 사용되는 프랑스 국기( 파란색 자유, 흰색 평등, 빨간색 우애)

이런 분위기적 바탕에 경제불황과 흉작, 왕가의 재정 파탄, 결국 프랑스 1789년 7월 14일 시민과 농민을 주축으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을 시작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앙시앵 레짐을 무너뜨렸으나, 그후 프랑스는 80년 동안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여러번 바뀌면서 불안하고 혼란한 정세를 겪기도 하는데요. 이는 결론적으로 세계 민주주의 발전에 뼈대를 세웠고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고 볼수 있습니다.

카리브해 -출처 위키백과

※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 카리브 해(대서양과 멕시코만이 접한 바다)의 '아이티'는 1791년 투쟁을 시작하고 1794년 첫 흑인 노예제 폐지를 이끌어 낸 후 1801년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를 막기 위한 프랑스 원정대의 활동은 시작되지만 노예제 부활에 대한 현지인들의 강한 저항과 모기로 전파되 치사률이 높은 바이러스성 황열병, 더불어 당시 프랑스와 좋지 못했던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1803년 11월 아이티 점령을 포기하고 철군하게 됩니다.

 

아이티는 1804년 1월 1일 정식으로 독립 했는데요. 이는 흑인 최초의 공화국이고 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독립한 국가가 됩니다. 아이티의 독립은 훗날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데요. 스페인이 정복한 중남미의 식민지들도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프랑스 제1제국 황제 나폴레옹과 대프랑스 동맹"


군인 출신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éon Bonaparte)'는 1804년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1815년까지 황제 였는데요. 프랑스 혁명으로 루이 16세가 처형되는 것을 지켜본 유럽의 군주들은 자국의 국민들이 영향을 받아 동요할 것을 염려해 프랑스 혁명 세력을 굴복시키기 위해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국가들의 동맹을 결성하게 됩니다.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원정에 승리하면서 프랑스 령으로 일부 영토를 수복하는 등 프랑스의 기세가 강해져 실패하게 됩니다. 그로인해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은 1797년 해체가 되었다가 다시 제2차 대프랑스 동맹(1798년)을 결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여전히 프랑스 혁명세력의 기세를 꺽을 수없었는데요.

나폴레옹 1세 황제 -출처 위키백과

그 사이 1803년 아메리카의 프랑스령 아이티의 독립에 대한 프랑스 재탈환이 결국 실패가 되고 본래 프랑스의 식민 영토였던 지금의 북미 대륙의 루지애나 지역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기 시작해 나폴레옹은 결국 헐값에 미국에 그 땅을 매각하고 매각대금을 이용해 전쟁비용에 사용하게 됩니다. 원래 나폴레옹은 아이티의 흑인노예들을 이용해 북미 루지애나 지역에 식민 제국을 건설할 목표였으나, 프랑스 대혁명으로 단점도 생겨났으니 지금 미국의 발전을 보면 아마 나폴레옹도 많이 놀래리라 의심치 않습니다.

녹색이 나폴레옹이 미국에 매각한 루지애나 지역 -출처 위키백과

이렇게 전쟁비용을 준비한 나폴레옹에 대해 유럽 군주들을 중심으로 제3차 대프랑스 동맹(1805년), 제4차 대프랑스 동맹(1806년)을 결성했지만, 나폴레옹은 승승 장구하게 되는데요. 중유럽 및 동유럽, 또한 러시아와 스웨덴의 전쟁을 계기로 북부 유럽까지 제압하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세력의 기세를 꺽으려는 유럽 군주들의 대프랑스 동맹은 계속 이어지는데요. 1809년은 제5차 대프랑스 동맹, 1813년은 제6차 대프랑스 동맹, 1815년은 제7차 대프랑스 동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812년 프랑스는 영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대륙봉쇄령을 내렸지만 이에 따르지 않는 러시아 제국을 정벌하기 위해 러시아 원정을 떠나게 되는데요. 그렇지만 프랑스 대육군이 러시아 제국에 궤멸되고 철수 하면서 제6차 대프랑스 동맹은 이로 인해 힘을 얻어 오스트리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의 3국은 새로운 전쟁을 개시하고 1813년 10월 16일 부터 19일까지 지금의 독일 영토에서 양측 합쳐 50만명이 넘는 병력이 전투를 벌인 '라이프치히 전투(Völkerschlacht bei Leipzig)'에서 나폴레옹에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게 합니다.

 

이로인해 대프랑스 동맹은 라인강 동쪽에 대한 프랑스 제국의 지배권을 소멸시키고 자유롭던 독일 지역의 중소 국가들을 대프랑스 동맹에 편입시켜 몸집을 더키우게 됩니다. 또한 전투 승리를 기점으로 1814년에 드디어 프랑스 본토에 입성하게되고 나폴레옹은 황제자리에서 물러나 엘바섬에 유배되게 되는데요. 1815년 엘바섬에서 탈출하여 권력을 다시 잡게 되지만, 같은 해 6월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여 완전히 몰락하고 맙니다. 그는 마지막 6년을 남대서양의 외딴 섬 지금의 영국령 세인트헬레나 롱우드에서 보내고 쓸쓸히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나폴레옹에게 교향곡을 헌정하려했던 베토벤 -출처 위키백과

※ 베토벤 교향곡 제3번 내림 마장조 작품 번호 55(영웅 Sinfonia Eroica) - 신성 로마 제국 본(독일)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제국 빈에서 사망한 클래식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은 1802년 오스트리아 제국 빈 주재 프랑스대사로 부터 나폴레옹에 관한 이야기를 듣곤했는데, 그는 공화제와 인민들의 영웅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은 그런 영웅 나폴레옹에게 헌정할 작곡중인 교향곡 제3번을 '보나파르트'라고 이름 짓게 되는데요. 하지만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베토벤은 실망과 탄식을 하며, 보나파르트라 적힌 악보 표지를 찢어 버리고 그에 대한 음악 헌정도 포기했으며 교향곡 제목도 '영웅'으로 바꾸게됩니다.

"혼란에서 안정되는 프랑스와 자유로 맺어진 친구 미국"


과거 나폴레옹 1세 황제의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국가는 여러 분란을 거듭하다 1870년에 들어서 프랑스 제3공화국이 들어서게 되는데요. 이 시대 부터 프랑스는 안정을 찾기 시작합니다. 과거 같은 적이 였던 영국을 경계하며 미국의 독립을 지원했던 프랑스, 나폴레옹 1세의 루지애나 영토 매각으로 부터 쌓인 미국과 프랑스 국민들 간의 좋은 느낌, 또한 자유에 대한 생각과 시선이 같아서 일까요? 프랑스 국민들은 미국의 독립 100주년을 기념해주기 위해 당시 40만 달러의 모금으로 높이 93.5미터, 무게 204톤에 이르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을 1885년 1월 증정하게 됩니다.

자유의 여신상 -출처 위키백과

자유의 여신상은 1865년 프랑스 역사학자 에듀타르 라불레가 미국의 남북전쟁 후에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에 영감을 받은 자유 여신상 건립을 제의하여 시작된 아이디어인데요. 1874년 디자인은 라블레가 프레데리크 오귀스트 바르톨디에게 의뢰하였는데, 에펠탑으로 잘 알려진 알렉상드르 귀스타브 에펠(Alexandre Gustave Eiffel)도 참여 했다고 합니다.

 

자유의 여신상 운반은 프랑스에서 조립 해체 후 배를 이용해 미국으로 운반했다고 하는데요. 정작 미국에 도착한 해체된 자유의 여신상은 조립 예산이 없어 방치되었다가 헝가리계 미국인 신문기자이자 신문사 경영인인 '조지프 퓰리처(Joseph Pulitzer)'에게 이 사연이 전해지고 신문 모금 캠페인을 통해 재조립 금액을 지원받아 4개월에 거쳐 드디어 재조립하게 됩니다. 원래 겉면이 구리여서 붉게 빛나던 자유의 여신상은 서서히 산화하여 푸른 빛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다만 횃불 부분은 1985년 수리과정에서 나중에 금으로 도금했다고 합니다.

미국 이민박물관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 현판 -출처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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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여신상 받침대 입구에 있는 현판에는 지을 기금을 모으기 위해 에머 래저러스가 지은 에머 래저러스가 지은 "새로운 거상(The New Colossus, 1883)"이라는 시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Not like the brazen giant of Greek fame,
With conquering limbs astride from land to land;
Here at our sea-washed, sunset gates shall stand
A mighty woman with a torch, whose flame
Is the imprisoned lightning, and her name
Mother of Exiles. From her beacon-hand
Glows world-wide welcome; her mild eyes command
The air-bridged harbor that twin cities frame.

"Keep, ancient lands, your storied pomp!" cries she
With silent lips. "Give me your tired, your poor,
Your huddled masses yearning to breathe free,
The wretched refuse of your teeming shore.
Send these, the homeless, tempest-tost to me,
I lift my lamp beside the golden door!"

정복자의 사지(四肢)를 대지에서 대지로 펼치는,
저 그리스의 청동 거인과는 같지 않지만
여기 우리의 바닷물에 씻긴 일몰의 대문 앞에
횃불을 든 강대한 여인이 서 있으니
그 불꽃은 투옥된 번갯불, 그 이름은 추방자의 어머니
횃불 든 그 손은 전 세계로 환영의 빛을 보내며
부드러운 두 눈은 쌍둥이 도시에 의해 태어난, 공중에 다리를 걸친 항구를 향해 명령한다.

"오랜 대지여, 너의 화려했던 과거를 간직하라!"
그리고 조용한 입술로 울부짖는다
"너의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를 열망하는 무리들을
너의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램프를 들어올릴 터이니!"

 

"랜드마크와 명품 브랜드"


1989년은 프랑스 만국 박람회에 우리나라의 조선으로 최초로 참가한 해이기도 하는데요. 프랑스 혁명 100주년이자 프랑스를 대표하는 길이남을 랜드마크가 건축된 해이기도 합니다. 프랑스는 만국 박람회에 맞춰 파리 마르스 광장 출입 관문쪽에 격자 구조의 철로 이루어진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324미터의 '에펠탑(Tour Eiffel)'을 선보이는 데요. 자유의 여신상 디자인에 참여하기도 한 프랑스 공학자이자 건축가인 알렉상드로 귀스타브 에펠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어지게 됩니다.

알렉상드로 귀스타브 에펠 -출처 위키백과

지금의 아름다운 느낌과 다르게 당시에는 도시미관을 저해한다는 비난도 많았는데요. 만국 박람회 이후 20년이라는 계약 만료로 인해 1909년 철거될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통신 시설물을 설치해 활용가능하다는 이유로 해체위기를 모면합니다.

파리 에펠탑 -출처 위키백과

결국 에펠탑은 여러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하며 인지도가 높아지며 파리하면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되고 마는데요. 1985년이 되서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 된 후로 파리의 야경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데 일조하여 로멘틱하고 사랑스러운 건축물로 인정받게 됩니다.

 

지금의 세계 3대 명품 중 하나로 꼽히는 '샤넬'은 1909년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Bonheur "Coco" Chanel)이 자신의 첫 가게를 파리에 열고 부터 시작됩니다. 그녀는 여성복의 혁신을 이룬 패션 디자이너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는데요. 이와 더불어 1921년에는 샤넬 향수로 영역을 넓혀 더 큰 인지도와 명품 럭셔리 브랜드로 각인되는 계기를 만들게 됩니다.

가브리엘 코코 샤넬 -출처 위키백과

※ 샤넬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독일군 장교와 애인관계로 지내며 나치의 스파이 노릇도 하였다고 전해지며 이로인해 과거의 행방이 밝혀져 전후 프랑스에 살지못하고 스위스 로잔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됩니다. 1954년 스위스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파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녀의 브랜드는 과거 나치와 협력한 이력에 경멸을 받지만 미국에서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더불의 그녀의 패션이 오히려 인기를 끌게 됩니다. 미국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패션 디자인으로 모드 오스카 상을 수상하기도 하며 다시 이미지는 좋게 굳어지는 데요. 다만 프랑스 현지에서는 나치독일에 협력한 이유로 그녀가 88세의 나이로 사망한 1971년, 그녀는 조국 땅에 묻힐수 없었고 망명생활을 했던 스위스 로잔에 매장되게 됩니다.

 

이처럼 프랑스는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의 참전 국으로 승리하며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당시 프랑스 식민제국은 1938년에 정점을 이루고 당시 세계인구의 5%가 프랑스 영토에 거주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1939년 9월 1일~1945년 9월 2일) 때는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 본토가 점령되 많은 고난을 겪게 되며 이후에는 독립을 원하는 프랑스 식민지들과의 전쟁(알제리, 베트남)으로 많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1944년 연합국 군대에 의해 해방되고 제4공화국이 세워졌지만 알제리 전쟁으로 인해 사라지게 되며, 1958년 샤를 드 골 대통령이 제5공화국을 설립하게 됩니다. 과거 식민지와 같은 제국의 유산으로 인해 전세계 3억명에 가까운 인구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위상이 높아 현재의 유럽 연합 설립 당시부터 독일과 함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파리 신드롬"


군주제 폐지의 기치로 또 다시 일어난 프랑스 민중혁명(1832년 6월 봉기)이 배경인 레미제라블, 파리의 에펠탑,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용감한 잔다르크, 베르샤유의 장미, 왕족의 품격, 명품 샤넬, 향수, 샹송의 여왕 에디트 피아프, 자유 그리고 낭만적인 파리에서의 로맨스 등, 프랑스의 역사와 매체들을 들여다 보면 프랑스에 대한 환상이 생길 수가 있는데요.

 

우리 옆나라 일본에서는 그런 프랑스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해 생기는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병이 발현되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이를 "파리 신드롬(Paris syndrome)"이라고 하는데요. 큰 충격으로 인해 환각과 피해망상 증상을 겪기도 한다고 하는데, 어릴적부터 부유하게 자라고 패션과 여행등에 관심이 많은 20~30대 여성들에게 많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나라를 광적으로 동경하고 드라마 같은 방송매체에서는 '돈이 있다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라거나 '프랑스에서 수입한 명품'이라거라 에펠탑이 보이는 낭만적인 파리를 상상하면 항상 아름답고 깨끗한 이미지인거 같지만, 막상 실제 관광을 가보니 노숙자와 소매치기도 보이고 길거리엔 개똥과 쓰레기들도 굴러다니며 부드러운 프랑스 남자인것만 같던 사람들이 인종차별과 성추행을 일삼거나 하는 일상에 문화적 충격을 받아 파리 신드롬을 겪을 수 있는데요.

베르샤유의 장미 -출처 야후재팬

이케다 리요코(池田理代子)가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창작한 일본 만화 '베르샤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에서 볼수 있다시피 반짝이는 두눈과 화려한 의상의 순정 만화 그림체는 일본인의 프랑스에 대한 상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일 지도 모릅니다.

 

비단 일본인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겪는다고 전해지는데요. 과도한 지역적 문화적 동경은 뭐든 적당한게 좋겠습니다. 다 사람 사는 곳이기 때문에 비슷할테니까요.

 

제 외국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대부분, 그들은 한국을 평생 꼭한번 가보고 싶은 나라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데요. 그렇듯 요즘은 BTS등의 한류 열풍으로 인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로 부터 한국이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건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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