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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0년 봄. 우리나라 조선시대로 말하면 조선 영조 6년.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 장군 나디르 샤(1688~1747)는  
영토 서쪽, 당시의 최대 적인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기로 결심합니다.  

 

사파비 왕조와 오스만 제국 깃발

 



사파비 왕조 vs 오스만 제국의 전쟁. 
1만 5천명  vs 8만 명으로  5배 이상 차이나는 병력이었는데요. 병력만 봐도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고 이길수 있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이미 1729년 '담간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에게 반란을 일으킨 호타키 왕조와의 싸움에서   
큰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사파비 왕조(2만 5천명) vs 호타키 왕조(5만 명) = 사파비 왕조 승! 그의 특유의 전술을 이용해 보기로 하는데요. 

그는 오스만 제국과의 장장 5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오스만 부대는 5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나디르 샤의 군대는 멀쩡히 무사하여
사파비 왕조인 나디르 샤의 승리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승리 요인중 하나인 전술은 뛰어났습니다. 매복 후 기습 포격하는 나디르 샤의 뛰어난 전술은  
거센 불을 쉴세없이 뿜어되는 드래곤처럼 순식간에 적진을 불바다로 만들어  
멀리서 날아오는 포격에 오스만 군은 반격할 기회 조차 없이 처참한 패배를 맞이 하였습니다.  

과연 그의 전술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치명적인 공격이 가능했던 낙타였습니다  
낙타가 어떻게 치명적인 무기가 되었냐고요?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화약시대에 걸맞게 낙타 등에 회전식 대포를 장착하였는데요, 일명 '낙타포'라 부르거나 
 이를 '잠부라크(zamburak (Persian: زمبورک‎)'라고도 불렀는데  
안정성과 기동력이 아주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잠부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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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포를 잠부라크라고 불리게 된 계기는 기원전 이집트인들이 낙타에서 거대한 석궁을 쏜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석궁을 쏠때 나는 소리가 '잠부르'라는 말벌이 내는 소리와 흡사해서 불려진 이름이라고 합니다.

 

전쟁 중 잠부라크를 쏘던 포병은 '잠부라키'라 불렀습니다. 대포를 쏘는 방식은 대포를 발사할 때 낙타의 다리를 묶고 무릎을 꿇게 했는데..

 

이는 대포를 포병의 키에 맞춰 쉽게 조준하고 낙타가 대포에 반동에 놀라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초동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잠부라크 부대는 일제히 모여 사격을 하면 엄청난 화력을 뽐냈고 낙타에 봉긋하게 쏟은 혹은 적의 총이나 화살을 방어할 수 있는 방패 역활까지 해주었다고 하네요.

 

 



또한 낙타의 이점이 많은데요. 

그 이유는 당시 전투를 치르던 장소가 대부분 사막이었기 때문입니다.  
척박하고 거친 사막에서 낙타만큼 가장 유용한 전투 수단이 없었고 낙타는 100kg 이상의 짐을 적재한 몸으로  
무려 17일 동안 음식없이 버틸 수 있는 강한 체력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낙타는 전력질주 하면 속도가 무려 60km/h로 결코 느린 동물이 아닌데요.   
말의 최고 속도가 80km/h라니 낙타도 얼마나 빠른지 감을 잡을 수 있겠죠?

 

그리고 짐만 나르던 낙타를 전쟁에 동원하기 시작한 이유도 적군이 탄 말들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는데요. 
당시 전투에 동원된 말들이 낙타를 아주 무서워했습니다.

 

말들은 혹이 있는 낙타의 생김새, 소리, 냄새에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기 바빴습니다.

 

그로인해 오스만의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고 패할 수밖에 없는 요인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프랑스 포병출신의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는데요. "위대한 전투들을 보면 승리는 항상 포병과 함께였다."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 그의 진정한 포병은 낙타가 아녔을까요?




▶파란만장한 인생 

 

나디르 샤

 


나디르 샤 - 양치기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페르시아를 아프가니스탄의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고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에 뺏긴 영토를 회복시킵니다.

 

그 후 1737년 사파비 왕조에 이어 아프샤르 왕조의 창시자로 즉위했습니다.   
즉위 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인도의 무굴제국을 침략하고 많은 시민 학살을 자행했으며 1739년 델리를 점령하게 되는데요.

 

그는 '빛의 산' 또는 '코이누르'로 불리는 '소유한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전설로 유명한 105캐럿의 보석을 약탈해갑니다.(현재는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왕관에 박혀있고 마하트마 간디의 증손자가 인도 반환운동을 벌이는 중)

 

또한 훗날 델리에서 나디르 샤가 저지른 학살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이후 인도어에 대량학살을 뜻하는 '나디르샤시(Nadirshahi)'라는 단어가 탄생하는 계기가 됩니다.

 

그 후 1740년에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해당하는 부하라, 히바의 두 칸국을 항복시키며 아프샤르 왕조의 위세를 크게 떨치게 되는데요.  

 

아프샤르 왕조 깃발

 


그러나 재위 기간 중 건강악화와 영토 내 반란들이 끊임없이 생겨나자 분노한 나디르는 신하와 승계자들을 죽이거나 불구로 만들기도 했는데

 

그런 그의 공포 정치로 인해 인심이 이탈되고 1747년 쿠르드족의 반란을 진압하는 중, 궁중 반란으로 인해 그의 신하에게 암살되고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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