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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 (Tomorrow is another day!)."

타라 농장에서 불타는 노을을 배경으로 떠나버린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를 그리워 하며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가 말하는 명대사는 지금까지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Gone with the Wind)' 영화의 함축된 의미로 자주 회자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 1992년 2월 초쯤 무심코 저녁 늦게까지 TV를 시청하다 KBS 우리말 제작 영화로 처음 이 영화를 접하게 되는데요. 그땐 어렸지만 나름 감성적이고 순수한 마음에 엄청난 감동을 느낀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의 영화 배경 음악도 아직 기억이나 흥얼될 정도니까요. (1992년 4월 29일은 LA 폭동이 일어났었음) 그런 저의 명작 영화가 최근 미국내에서 인종차별 영화로 불똥이 튀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과 영화에 대해 알아보고 최근 불거진 조지 플로이드 사건의 파장으로 이 영화가 인종차별의 희생양이 되어 퇴출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 까요.

 

 

영화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과 영화의 시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의 스토리는 미국의 남북전쟁 (1861~1865)을 배경으로 강인한 의지를 가지고 전쟁 중과 전후 시대를 살아간 남부지역의 스칼렛 오하라의 파란만장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요.

작가 미첼이 이 소설에 처음 붙였던 가제는 원래 "옛날 남부에 대한 원고(Manuscript of the Old South)'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더 나은 정식 제목을 고민하던 중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 대사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로 제목으로 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출판사의 설득으로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제목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바뀌게 되는데요. 이 제목은 영국의 19세기 낭만파 시인인 '어니스트 다우슨(1867~1900)'의 '키나라'라는 시에서 따온 것으로 출판사인 맥밀란과 미첼이 협의해 소설의 제목으로 최종 채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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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1936년 6월 30일 처음 출판돼는데요. 총 947페이지에 63장으로 이루어진 이 방대한 소설은 출판이 되자마자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6개월 만에 100만 부가 팔렸고 이듬해 작가에게 퓰리처상을 안겨줬습니다.

더욱이 이 소설은 1939년 빅터 프레밍 감독이 '비비안 리(스칼렛 역)', '클라크 게이블 (레트 역)'을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하면서 아카데미시상식에서 13개 부문 후보로 올라 8개 부문에서 상을 거머쥐었고 명예상 1개와 기술상 1개 까지 추가 하는 등의 성공을 이루게 되는데요.

그 여파로 영화뿐 아니라 소설은 미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더욱 큰 인기와 명성을 얻었으며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40개 언어로 번역됐고 3000만 부 이상이 팔리는 센세이션을 잃으켰습니다.

 

 

소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미국의 남북전쟁 (American Civil War) (1861~1865) - 남북전쟁은 1861년 4월 12일부터 1865년 5월 13일까지 아메리카 합중국과 아메리카 연합국이 노예해방을 놓고 벌인 전쟁이다. 북부군은 링컨 대통령이고 남부군은 제퍼슨 데이비스 대통령이었다. 결국 4년간의 전쟁끝에 북부군이 승리하여 노예가 해방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222분의 긴 런닝타임과 그 시대 당대 최고의 제작비인 425만달러가 투자되었으며, 총스탭 4,400명, 등장 동물로 말 1,100마리, 돼지 375마리, 배우들 의상만 4,118벌이 사용되었으며, 12명의 참여작가 3명의 감독 손을 거쳐 140일 만에 촬영이 완료 되었다. 제일 비중있는 여배우를 뽑기 위해 1,400명의 여배우가 면접을 보고 그중 400명의 대본 오디션을 거쳐 주인공 스칼렛 배역에 '비비안 리'가 선발되었다. 하지만 비비안 리는 상대 배우 레트 역인 '클라크 게이블'의 입 냄새 때문에 죽고 싶을 정도로 키스 신을 꺼렸다는 인터뷰 일화도 유명하다. 또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으로 '해이티 맥대니얼'이 수상하였는데 이는 흑인 배우 최초의 성과였다.

*1991년 미국남부 찰스턴 출신의 여류작가 '알렉산드라 리플리'가 그 속편 '스칼렛 (Scarlett)'을 써서 발간 이후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며 전세계 40여 개국에서 번역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소설가 마거릿 미첼 (Margaret Munnerlyn Mitchell) 1900년 11월 8일 ~ 1949년 8월 16일

미첼은 1936년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유명한 미국의 작가로 그녀는 미국의 남부 조지아주 애틀랜타 출신으로 남북전쟁이 일어난지 약 40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로 부터 남북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독서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어릴때부터 항상 무엇을 쓰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라고 나서는 부지런히 메모를 하는 버릇을 들였습니다. 이런 습관들은 나중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소설의 배경인 남북전쟁 때의 경험담을 잘 모을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좀더 성장하여 그녀는 애틀랜타 워싱턴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어머니의 뜻에 따라 북부에 있는 명문 여자 대학인 '스미스 대학교'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했습니다. 그곳에서 '헨리'라는 육군 장교와 사랑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헨리는 안타깝게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사망하고 말았고, 이후 어머니 마저 스페인독감으로 잃게 되자, 1918년에 학교를 중퇴하고 다시 고향 애틀랜타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시련은 그녀가 차후에 집필할 소설에 대해 많은 영감과 영향을 주게 되는데요. 그 후 애틀랜타의 언론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25세때 직장 동료와 결혼하여 평범하게 살아가던중 26세가 되던 해에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신문사를 그만두고 그녀가 예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소설을 3년만에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후 6년 동안 손대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는데요. 소설의 출판은 마가릿 미첼의 인내와 끈기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소설을 완성하고 처음 몇년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선뜻 무명 작가의 소설을 출간 해줄려는 출판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자신의 소설을 계약해줄 출판사를 물색하던 중 하루는 애틀랜타에 온 유명한 맥밀런 출판사의 사장인 레이슨이 기차로 뉴욕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어렵게 그 원고를 그에게 전달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쓴 소설 원고예요. 꼭 좀 읽어봐주세요." 레이슨이 그 원고를 선반에 올려두었는데 지나던 차장이 그 원고를 읽고 감동을 받아 전보로 레이슨 사장에게 그 원고의 몇 페이지라도 읽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로인해 그녀의 소설은 빛을 볼수 있었고 베스트셀러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1936년 6월 30일에 발표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은 1939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더 유명해지고 엄청난 명성과 부를 안겨다 주는데요. 그렇게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며 살아가던 어느날, 그녀는 뜻밖에 불운을 겪고 맙니다. 1949년 8월 11일 저녁, 그녀는 남편 존 마쉬(John Marsh)와 함께 영화 '캔터베리 이야기'를 보러가는 도중에 애틀란타 13번가의 피치트리거리(Peachtree Street 1401번지)를 건너다가 과속으로 달리던 자동차에 치여서,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채 5일만에 그래디 병원(Grady Hospital)에서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맙니다. 미첼은 소설가로서 이 한 작품만을 남겼을 뿐인데요. 그녀는 애틀랜타의 오클랜드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마거릿 미첼

 

 

 

인종차별 쓰나미에 쓸려가는 영화

미네소타 주의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인종차별적인 강압적 폭력에 사망한 사건으로 인해 미국내에 인종차별 갈등이 극악으로 치닫고있습니다. 그러다가 불똥은 영화로도 번지고 있는데요. 최근 2014년작 ‘노예 12년’으로 유명한 '존 리들리 (John Ridley)'가 LA타임스 칼럼을 통해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노예제의 공포를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다며 그 영화를 당장 내려라'고 공개 비판하자 분위기의 심각성을 느낀 HBO 맥스는 9일 신속하게 방영가능 콘텐츠 목록에서 지워버립니다.

HBO 맥스는 성명을 통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사회에서 흔한 인종적 편견을 일부 묘사하고 있다. 인종적 묘사는 그때나 지금이나 잘못된 것이다. 더 정의롭고 공평하고 포용적인 미래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역사부터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또한 조만간 ‘역사적 맥락’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재상영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라면 다른 OTT 플래폼에서도 인종차별적 영화가 퇴출될 조짐이 강하다고 봅니다.

 

 

존 리들리

 

 

 

*HBO맥스 - 워너미디어가 새롭게 5월 27일 선보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이다

*OTT (Over The Top) - 기존 통신 및 방송사가 아닌 새로운 사업자가 인터넷으로 드라마나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이용 시간이 자유롭고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다양한 기기에서 소비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OTT 플랫폼은 넷플릭스(Netflix), HBO맥스가 있다. 

 

영화의 무엇이 그들을 자극하는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남부 지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내에서는 흑인들은 오직 흑인 노예와 흑인 하녀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백인들의 설정은 부자거나 편하게 생활하는 모습으로, 또는 백인우월주의 단체인 KKK를 미화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처럼 미국내 인종 갈등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선 불편한 작품임엔 분명한 사실입니다.

 

 

 

 

 

흥행한 영화로 인해 미국 흑인배우 최초의 아카데미 수상자가 배출되었다.

이 영화가 비판받을 만한 내용만 담고 있는 건 아닌데요. 소설을 기반으로 한 탄탄한 스토리, 그리고 많은 자본이 투입되어 완성도 자체가 워낙 훌륭하여, 유모 역을 맡은 '해티 맥대니얼'은 흑인 배우로는 사상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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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당시에도 인종차별은 남아있어 당시 조지아 주에 적용되있던 '짐 크로우법'으로 인해 그녀가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여하지 못한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해티 맥대니얼

 

 

 

*짐 크로우법 (Jim Crow laws) - 짐 크로우라는 이름은 1830년대 뮤지컬쇼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음유시인들이 벌인 뮤지컬쇼에서 백인들이 얼굴을 검게 칠하고 흑인 역할을 하며 쇼 공연을 했었는데 대부분 흑인들을 비하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법으로 인해 흑인들은 철저하게 차별당했는데 흑인은 흑인전용 문을 사용한다거나, 백인과 같이 식사할수 없고, 화장실과 물마시는 곳도 구별되었으며 심지어 교회와 감옥, 묘지도 다르게했다. 또한 버스나 기차를 타도 흑인은 맨 뒷자리에 앉아야 하며 뒷자리에 타도 백인이 오면 자리를 양보해야하며 공공장소에는 개와 흑인 출입금지 간판까지 생겨났다. 이 인종차별적 흑백분리정책법은 1880년대에 제정되어 미국 남부의 여러 주와 도시가 실시하였다.

 

 

짐 크로우법으로 차별당하는 흑인

 

 

 

새삼 미국의 인종차별은 과거로 부터 왔다고 느껴지는데요. 남북전쟁의 승리자이자 그런 악법에 반기를 들었던 미국 16대 링컨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john ridl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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